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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6.25 [단편] 빨래하기 좋은 날 6

하늘이 파랗습니다. 지난 며칠 간 비가 계속 내리더니 오늘 아침에는 구름 한 점 없이 그저 맑기만 한 게 눈부시도록 파랗습니다. 창문너머의 저 파란 하늘이 너무 눈이 부셔 뜨고 있는 눈을 다시 살며시 감았습니다. 이젠 붉은 세상이 보이는군요. 눈꺼풀을 뚫고 들어오는 햇살은 흙자주 빛입니다. 흙 자주 빛 속에 계속 누워있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파란 하늘이 펼쳐진 게 아주 오랜만이거든요. 그러니 밀린 빨래들을 하기에 정말 안성맞춤인 날입니다.


방 곳곳에 널브러져 있는 옷가지를 챙깁니다. 굽굽해진 이부자리도 챙깁니다. 옷가지와 이부자리까지 모아 놓으니 빨래거리들이 참 많군요. 지금 입고 있는 옷도 빨래를 해야겠군요. 너무 더러워졌거든요. 반쯤 열린 비닐 장롱 속에 까만 반바지와 붉은진흙 색 티셔츠가 보이는 군요. 갈아 입습니다.

 

주섬주섬 양팔 가득빨래거리들을 챙겨 방 바깥으로 나왔습니다. 방안에서보다도 더욱 밝은 햇살이 눈부시게 옥탑방문 앞으로 쏟아지네요. 비 온 뒤라 그런지 햇살이 더 눈을 따갑게 하는 것 같습니다.

 

붉은 대형 고무 대야에 빨래 가지들을 넣고 수돗물을 채웁니다. 콸콸 쏟아지는 수돗물이 시원하게 느껴집니다. 가루비누를 물에 풀어 부글부글 거품을 일으킵니다. 거품 속으로 맨발을 집어 넣습니다. 따가운 햇살과는 반대되는 차가운 기운이 온 발을 감싸고 등줄기까지 올라옵니다. 그래도 괜찮습니다. 그 차가운 기운이 왠지 속을 뻥 뚫어주는 것같습니다.

 

다리를 들어 첨벙첨벙 힘있게 발을 굴리고 싶은데 무릎이 아파오네요. . 허리도 아파옵니다. 그리고 어깨도. 하지만 이렇게 맑은 날에 빨래를 하지 않으면 이 많은 빨래를 또 언제 다 할 수 있을지 알 수가 없습니다. 또 언제 비가 다시 올지 모르거든요. 다리에 다시 힘을 주고 무릎을 굴려봅니다.  검붉게 올라오는 거품들이 햇살에 반짝반짝 거립니다.

 

한참을 다리를 굴리다가 발을 빼냅니다. 물을 먹어 무거워진 빨래를 옆의 작은 대야위에 건져내고 물을 하수구에 쏟아 버립니다. 쿠럭쿠럭 소리내며 내려가는 빨랫물이 회색빛으로 말라있던 옥탑 시멘트 바닥을 까맣게 물들입니다.

 

다시 물을 대야에 받습니다. 건져두었던 빨래를 다시 담굽니다. 발을 다시 대야로 집어 넣습니다. 발을 구르다가 허리를 피고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었습니다. 햇살에 눈은 저절로 감겨집니다. 햇살이 사라지기 전에 빨래를 빨리 널어야겠습니다.

 

아가씨? 아가씨?

 

한참을 다리를 움직이고 있는 데, 누군가 절 부릅니다. 주인집 아주머니께서 올라오셨습니다.  계단을 다 오르시지도 않고 고개만 빼끔 내 놓으시고는 이야기 하십니다. 

 

빨래 하는 거야? 근데 혼자야?

 

제 눈치를 한번 살피시던 아주머니는 고개를 살짝 돌려 옥탑방문을 슬쩍 쳐다보십니다. 그러고는 다시 제 얼굴을 쳐다보시며 말을 이거 가십니다.

 

물 좀 아끼지 그래? 아까부터 계속 물소리가 들리던데. 안 그래도 요즘 수도세가 어찌나 많이 올랐는지…… 그리고 내일 월세 늦지 않게 알았지? 이번엔 절대 늦으면 안돼. 우리집 아저씨가 꼭 그렇게 전하래.

 

고개만 내놓고 이야기하던 아주머니는 고개를 살짝 돌려 옥탑방문을 다시 한번 슬쩍 쳐다보십니다. 그러고는 다시 내 얼굴을 쳐다보시더니 목소리를 낮추시고는 물어보십니다.

 

근데 어제 또 뭔 일있었어? 얼굴 보아하니… 쯔쯔쯔. 에구. 왜 그러구 살어 정말. 내가 다 답답해서 그래. 조용히 살면 좀 좋아. 쯔쯔. 하긴 아가씨가 너무 착해서 그래. 너무 착해서. 말도 못하고 조용하게 당하고만 있지 말고. 알겠어? 보는 사람들이 답답해서 정말. 으휴. 내가 뭔 참견이라고. 에휴. 암튼, 내말 무슨 말인지 알지? 조용히, 조용히 잘 하면서 살자 이거지 모. 여튼 요번에는 월세 정말 늦지않게… 응? 알았지?

 

혼잣말을 하시는 건지 아니면 제게 이야기를 하신 건지 조근조근 몇 마디 더 하시더니 아주머니는 저와 한번 더 눈을 마주치시고는 몸을 돌려 금새 계단 아래로 사라지십니다.

 

아주머니께서 사라지신 계단을 잠시 쳐다보다가 다시 발을 굴립니다. 햇살이 눈 부실 때 빨래를 마무리해서 널어야 하거든요. 다시 더러워진 물을 빼내고 깨끗한 물을 담아 빨래를 헹굽니다. 

 

빨래 막바지입니다. 이제는 물 가득 머금은 옷가지와 이불을 짜야 하는데 영 팔에 힘이 없네요. 적당히 발로 밟아 일단 대충 물기를 빼냅니다. 옷가지들은 손목에 힘을 주고 돌려 대충 물기를 빼놓았는데, 이불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입니다.

 

일단 옷가지들을 제키보다도 높은 빨래줄에 팔을 쭉 뻗어 널어 놓습니다. 물이 덜빠져 무거워 휘청거리는 이불도 빨래줄에 널어 옆으로 쫘악 펴줍니다. 무거운 이불이지만 가늘지만 튼튼한 빨래줄위에 펼쳐집니다. 빨래 속 머금어져 있던 물이 아래로 뚝뚝 떨어지면서 햇살을 받아 반짝거립니다더럽던 빨래들이 제 색을 찾고 햇살아래에서 반짝반짝 거리면서 빛이 나는군요. 저렇게 반짝거리는 빨래들을 보고 있자니, 저도 함께 반짝거리는 것 같군요. 맑은하늘 아래 때를 벗어 밝아진 빨래들이 참 좋아 보입니다. 그리고 그 빨래들을 팽팽하게 잘 받아 들고있는 빨래줄도 대견스럽습니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보니 구름없이 너무나 맑고 파랗습니다. 눈을 감고 햇살을 온 얼굴로 받아들입니다. 감은 눈꺼풀을 뚫고 들어오는 햇살은 너무 뜨거워 점점 붉은 빛을 띠네요. 이런날은 빨래하기에 참 좋은 날입니다. 더러운게 깨끗하게 되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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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은 편 건물 옥탑방에 사는 대학생이 하교길 집으로 들어가다 빨래줄에 목이 매여져 축 쳐져 있는 그녀를 발견한 건 그날 오후 늦은 시간이었다. 신고전화를 받고 찾아온 경찰이 옥탑방에 칼에 가슴이 찔린 채 죽어있는 한 남성을 발견한 것도 그 이후였다. 주인집 아주머니는 어려보이는 경찰에게 이렇게 진술했다.

 

아니. 그렇게 착할 수가 없었는데. 어째 그랬을까나. 에고. 빨랫줄에 목맬줄 누가 알아.에이. 왜 그랬을까나. 그 착한게 소리도 못지르고 허구헌날 맞기만 하더니

 

소리를 못 질러요?

 

. 걔가 벙어리랬어. 어려서 목을 다쳤다나 그러던데, 그래도 귀는 안 먹었더라고. 그 서방이라는 놈이 좀 이상했어. 멀쩡하다가도 왜 그렇게 앨 때리던지. 에구. 어쩌다 보니, 지가 살려고, 그렇게. 그렇게 찔렀겠지. 그래도 어제는 전보다는 좀 조용한 것 같았는데.

 

그럼 전에도 둘이 싸웠다구요?

 

아니 가끔 그놈이 완전 미쳐가지고 날뛰면서 애를 패더라고. 내가 신고할까 했는데, 우리집 아저씨가 남의 가정사에 괜히 끼어드는 거 아니라고 해서 안했지. 경찰도 뭐 남의 가정사에 못 끼어든다면서. 경찰도 못하는데 우리라고 뭐 별수 없잖아요. 그리고 괜히 그랬다가 그놈이 미쳐서 우리한테까지 해꼬지 할 수도 있는 문제고. 우리가 이런 일이 일어날지 어떻게 알았겠어. 서방이라는데. 알았으면 당연히 진작에 신고했지. 그걸 어떻게 알어. 나야 하고 싶기도 했지만 우리집 아저씨가 하도말리는 통에……

 

-. 알았구요. 그럼 어제는 무슨 특별한 건 없었구요?

 

나긴 했는데 어제는 큰 소리는 안 났거든. 보통 그놈이 고함지르고 쾅쾅거리고 그러는데, 전에는 뭐 깨지는 소리도 들리더라고, 근데 어제는 거의 소리 안 났거든. 나야 뭐 별거 아닌줄만 알았지. 그래서 신고를 안했다니깐. 별일 아닌줄 알고. 그런데 대체 뭔일이 있었길래 그 착한애가 그렇게 사람을 찔러 죽이고는 목을 맺을까나  아까 빨래할 때만해도 별일 없어 보였는데 참.

 

? 그럼 아까 죽기 전에 봤단 말이에요?

 

? 내가? 아니. 아니. 그게 아니라…… 아니, 아까, 그래. 낮에. 물 내려오는 소리가 한참 들리길래에. 그래서 뭐- 빨래하나보다라고 생각했었다고. 본 게 아니라.

 

안 봤다구요?

 

. 그럼 안봤어. 그냥 물소리 나길래 빨래하는 것 같았다고. 오늘 날도 좋았잖아.

 

경찰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다음날 사건은 벙어리 여인이 남자의 폭행을 견디다 못해 우발적으로 범행을 저지른 후 자살한 것으로 마무리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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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신랑은 읽고 '너무 우울해.' 라고 평했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신지?



Posted by 지니프롬더바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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